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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봄, 다정한 햇살 아래에서.

 


정갈하게 깔린 미색의 레이스 테이블보 위 아기자기한 색감의 플레이트. 오밀조밀한 모양새로 정성이 듬뿍 들어갔음이 분명한 쿠키와 마카롱, 한 입 크기의 케이크 따위가 그릇의 빈자리를 장식했다. 테이블 끄트머리에 자리한 새하얀 티 컵에는 오렌지를 녹여낸 색의 은은한 찻물이 적당하게 들어차 있었다. 잔잔한 찻물이 흔들리는 위로 온화한 색의 푸른 하늘 아래 옅은 금색 머리칼이 봄꽃처럼 비쳤다. 하얀 뺨 위로 부드럽게 햇살이 내려앉는 모습은 마치 투명한 물감으로 그린 수채화를 연상시켰다.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여성은 온통 화려한 꽃나무 아래에서도 그저 단단한 나무처럼 흔들림 없는 올곧음을 보여주었다. 내리깔고 있던 눈동자가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소녀를 향하면, 긴 속눈썹 그림자가 내렸던 눈동자에 미미하게 작은 빛이 어렸다. 늦은 오전의 노란 햇빛이 붉은색 감도는 까만 홍채를 타고 반짝거렸다. 그 색은 태양 아래에서야 제 빛을 드러내는 일장석과 닮아, 평소에는 무감해 보이는 눈동자에 옅게 온기가 도는 순간을 소녀는 무척 좋아했다. 시화의 얇고 가지런한 손가락이 바람의 장난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었다. 일견 짜증스럽게도 보이는 그 손길에 건너편의 소녀가 짧게 웃었고, 시화는 짧게 눈을 흘겼다.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여름, 새카만 그림자를 밟으며.


 

드물게도 함께 거리를 걷게 된 정도 무렵의 시간이었다. 구름 하나 없는 맑은 하늘이 시야를 가득 메운 날이었던 탓에 여름 특유의 쨍한 빛이 짙은 음영을 그렸다. 어깨에서 허리를 타고 흘러내려 보드랍게 흔들리던 얇은 금사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화려하게 흐드러졌다. 옅은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얇은 소재의 흰 셔츠는 눈부시게 희었다. 아래로 뻗은 희고 긴 팔은 여름의 햇살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 곱기만 했으나 계절을 아주 피해가지는 못한 듯 더위로 희미하게 물든 눈가와 뺨을 볼 수 있었다. 선이 가는 얼굴과 뚜렷하게 자리한 이목구비는 자연스러운 붉은 기로 오히려 생동감이 돌았다. 잘 빚어낸 도자기 인형이 생명을 얻어 깨어난 것만 같이 발그레한 홍조는 종종 소녀가 잊던 시화의 본래 나이를 떠올리게 했다. 양산 따위의 물건은 거치적거린다며 빈손을 한 주제에 몇 번이고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더위에 짧게 불평하는 모습에, 소녀는 가만히 눈동자를 굴리다가 가만히 저 아름드리나무를 가리켰다. 그늘 아래로 피신하자 열기에 달아올랐던 뺨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나뭇결 사이로 스며드는 얄팍한 빛이 보석처럼 피부 위를 장식했다. 그에 맞추듯이 어느 쪽에서인가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기억에 새겨지지 않을 수 없는 여름날이었다.




 


가을, 비 내리는 날 우산에서는 꽃향기가 났다.


 

시화가 소녀의 저택에 찾아온 어느 날이었다. 희뿌연 하늘에서 가느다란 빗줄기가 끝없이 내렸다. 흐리게 깔린 물안개 너머로 선 시화의 모습을, 봄의 새순 같은 눈동자가 담고 있었다. 언제나 바른 자세로 당당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으나 안개 탓이었을까. 오늘의 시화는 평소의 당당하던 기색과는 별개로, 금세 스러져버릴 불안감을 띠었다. 손톱 끝까지 잘 정리된 가는 손가락이 쥔 우산 손잡이는 어떤 장식도 없이 검은 색이었으므로, 대비된 피부는 창백하기까지 했다. 해가 나지 않은 날씨 탓에 언제나 심지 굳게 빛을 품던 눈동자도 흐리게 보였다. 날씨가 주는 우울은 시화의 것인지, 혹은 소녀의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시화의 어깨 너머로 비에 젖은 흰색 장미가 비쳤다. 희뿌연 물방울이 끝없이 퍼져 시화와 그 주변을 감싸고 있었음에도, 흰 장미꽃잎을 타고 내린 물방울이 너무나도 선연했다. 젖은 땅을 딛고, 발을 내딛어 안개에 끌어안긴 시화의 옆에 선 소녀는, 가만히 말 없는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우산 밖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채 피지 않은 흰 봉오리가 젖은 물소리와 함께 꺾였다. 꽃잎에 타고 있던 물방울이 어리고 작은 손을 적셔, 그 손에서는 여름비의 향기가 묻어났다. 가만히 꽃을 들고 있던 소녀의, 닫힌 입술이 열렸다. 작은 입술이 내뱉는 것이 숨뿐인가 하다가, 이내 그 입술 사이로 시화의 이름이 촘촘히 내리는 비 사이로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건네진 말에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시화의 시선이 소녀를 향해 움직였다. 울적한 회색 하늘 아래 흐리다고 생각했던 시화의 눈동자는 여전히 투명하고 맑았다. 흰 손과 장미꽃이 비친 눈동자는 오히려 하얗게 반짝이는 듯 보이기도 했다. 우산 아래에는 비 냄새에 섞인 희미한 장미향이 흘렀다. 빗방울이 보석 같던 가을날이었다.

 





쌓인 눈밭에 발자국이 늘어선 겨울날에.

 


가볍게 숨을 뱉기만 해도 희게 숨결이 얼어붙는 날이었다. 세차게 몰아치던 눈은 그쳤으나, 하늘은 재를 태운 듯 회색빛을 머금은 채였다. 기분 나쁜 것을 본 마냥 짧게 눈을 찌푸려 떴던 시화는 이내 똑바로 앞을 보고 눈 위를 걸었다.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부츠가 절반 정도 눈에 파묻히며 깊은 발자국을 새겼다. 온통 흰 눈밭 위로 붉은색 케이프코트의 그림자가 일렁였다가 가라앉았다. 타인의 공간,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저택의 정원이었으나 시화는 익숙하게 걸음을 옮겼다. 몇 차례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 옷과 머리칼을 흩날렸음에도 그 뒷모습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굳건해 보이기만 했다. 테라스에서 시선만으로 시화의 뒤를 쫓던 소녀는 생각했다. 열기와 냉기에, 수차례 찾아온 고통스러운 세월에 벼려진 검을 떠올렸다. 한 발, 한 순간의 실수로 무너지고 깨질 생애를 가장 강한 무기로 만든 사람. 그 감상에 더불어 첫 만남의 경계와 적대감이 겹쳤다. 웃어버릴 정도로 변해버린 관계에 생각이 깊어지는 찰나, 계속 정원의 눈 위로 발자국을 그리던 시화가 뒤를 돌았다. 눈이 맞았다. 도화지 위, 이상향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녀를 그리리라는 상념을 흘려보내며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시화는 거기서 무엇 하느냐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더니, 드물게도 픽 웃어보였다. 희뿌연 구름 사이로 거짓말처럼 빛줄기가 하나 둘 땅으로 내려와 눈이 부신, 지극히 평범한 겨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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